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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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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간 시외전화업무 개시

청일전쟁이 끝나고 전쟁으로 인하여 거의 전멸상태에 있던 전신시설의 복구작업에 들어갈 때 새로이 발족한 농상공부는 1895년 3월 25일 에 제정 공포된 관제에서 우체사업과 함께 전신•전화사업을 관장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1898년 1월에는 궁내부 전화의 가설에 즈음하여서는 전보사에서 이를 관장하기로 기도한 바 있었으며, 1900년 3월에 통신원관제를 제정함에 있어서도 제13조에서 '통신원은 전신 • 전화 및 그 건설 보존에 관한 사항을 감독한다.'고 규정하였으니, 체신관서 관할하의 공중통신용 전화 개설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의 재정 사정 등 여러 가지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그 실현을 보지 못한 것 같다.

통신원령문그러나 1902년 3월에 이르러 한성 • 인천간에 통신원 경영의 전화가 개통됨으로써 공중통신용 전화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한성•인천간의 전화를 개설하게 된 경위와 그 구체적인 공사 진행등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재한 일본우편국이 한성 • 인천간에 전화를 가설하려고 기도한 사실에 크게 자극받아 사업 개시를 서두르게 된 것 같다. 일본은 청일전쟁 당시 우리 국내에서 불법으로 전시시설 가설을 자행하였는데, 1902년 전후부터는 전화 가설에 있어서도 많은 불법을 저질렀다.
따라서 당시의 전화 개설은 일본측의 불법 개설을 막기 위해 황급히 추진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렇게 하여 다음 날인 1902년 3월 20일에는 한성•인천간의 공중용시외전화업무가 개시됨으로써 우리나라 전화사업사상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통신원 총판은 영문으로 된 전화 이용 안내문을 외국공관에 보내 전화 이용을 촉구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충분한 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후 4월 24일에 칙령으로된 [전화규칙]이 공포되고 전보사 업무에 전화를 추가하였으며, 주사를 증원하여 전화업무를 겸간케 하는 내용의 [전보관제]의 개정이 공포되었다. 또한 4월 28일에는 통신원령으로 [전화세칙]이 제정됨으로써 전화업무의 개시에 따른 법제의 완비를 보게 되었다.

전화세칙그리고 당시의 전화사업에 있어서 특히 유의하여야 할 점은 시내 교환전화보다도 시외전화가 제1차적인 목적이었다는 사실이다. 한성 • 인천간 전화 개통도 양 지역간의 시외전화 개통을 말하는 것이고, 그 후 개성•평양•수원 등지에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시내교환전화는 동년 6월 한성에서 비로소 개시되었고, 인천은 다음해 2월에 이르러 시작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까닭은 아마도 당시의 도시생활이 그다지 광활하거나 복잡하지 않았으며, 당시 봉건적 사회체제하에서 전화를 설치할 만한 상류계층은 심부름하는 하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고, 오직 먼 거리, 즉, 지방과의 직접통신에 전화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전화요금에 있어서도 시내와 시외의 구별을 없앰으로써 시외전화에 더 중점을 두어 그 편의를 도모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1902년 3월 20일의 한성 • 인천간 전화 개설이후 그 이용자는 점차 늘어났고, 사업 범위도 차츰 확대되었다. 동년 5월 29일 한성•개성간의 전화 설치가 공고되어 2일 후인 31일에는 이미 개통되었으며, 동년 6월에 이르러서는 한성전화소에서 시내전화 교환업무를 개시하였다.
1903년에 들어서는 전화사업이 대폭 늘어났다. 우선 동년 2월 5일에는 개성 • 평양간 전화 설치를 공고하여 동일자로 업무를 개시하였다. 같은 무렵에 인천전화소에서 교환업무를 개시하였는데, 인천시내 전화교환업무 개시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신중공사와의 관련으로 그때까지 늦어진 듯하다.
이어서 한성전화소 관하의 4개의 전화지소와 한성 • 수원간 전화 개설이 잇달아 이루어졌는데, 그 설치 및 개국일자는 표1-32와 같다. 한성 • 수원간 통화와 한성 시내 전화지소의 개설은 모두 이미 앞서 본 전보지사의 개설과 병행된 것이었다.

한편 이 무렵에는 한성에서 평양에 이르는 전화전용선의 가설을 기도하였다. 1903년 6월 26일에는 당시까지 동일선으로 공용하던 한성 • 평양간의 전신과 전화선을 각각 별도로 설치하기 위해 필요한 전주를 준비할 것을 선로 지발관에게 시달하였고 7월 중순경에는 평양 • 삼화(진남포)간의 전화선 가설에 필요한 전주를 지방관으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였는데 별개 선로의 가설 방침을 변경하여 기설 전주에 첨설한 듯하다.
한편 7월 하순에는 평양전화소에서 교환사무를 개시하였다. 그리고 수원과 시흥에도 전화교환업무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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